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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명장 National Grand Master

강선영 姜善泳

1925년 12월 25일 ~ 2016년 1월 21일 
 
호 명가(明嘉)
 
■학력
안성여자고등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경영대학원 예술경영학 / 학사)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수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73년 국민훈장 목련장
서울시 문화상
 
■경력
1992.05~1996.05 제14대 국회의원 (전국구/민주자유당)
1988.12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예능보유자
1985.09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국가무형문화재 제 92호 태평무 보유자 
 
강선영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명목리에서 1925년 3월 30일에 태어났다. 강선영은 소학교 시절 학예회에서 무용을 하며 춤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선생님은 강선영의 춤사위를 보고 강선영의 어머니에게 강선영에게 재능이 있으니 무용을 시켜볼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할아버지는 강선영의 예술 활동에 극심한 반대를 하며, 강선영과 그의 어머니를 내쫓기까지 하였다. 쫓겨난 모녀는 평택에서 전세방에 하숙을 치며 생활을 했지만, 오히려 무용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강선영의 어머니는 강선영이 13세가 되는 해, 당대 최고의 무용가 한성준에게 보내 전통 무용을 가르쳤다. 강선영의 할아버지는 예인을 선발하여 궁중에 들여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예술가인 한성준, 이동백, 정정렬 등과 어울리는 사이였다. 이 덕분에 강선영은 한성준의 배려 아래 무용을 배울 수 있었다.
 
1943년 부민관에서 제1회 무용발표회를 열었고, 17세에는 동양극장에서 공연하기도 하며, 광복될 때까지 만주, 일본 등을 돌며 공연을 열었다. 그러던 중 일본 강점기 일본군 강제위안부 모집이 일어나던 시기, 일본군 강제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천안의 형부 집에 피신 중 결혼을 하면서 그녀의 활동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시시때때로 어떻게 하면 무용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늘 고심하고 있었고, 광복 후에는 강선영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본격적인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대전과 부산에서 지내면서 9⋅28 수복 후에 서울로 올라와 무용학원을 열었다. 이후, 강선영은 1960년 파리 국제민속예술제에 참가하면서 유럽 일주 공연과 아시아 지역 등 북·남미, 중동, 아프리카, 동구권 까지 많은 나라에서 공연을 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공연 업적으로 1972년 뮌헨 올림픽의 한국 민속예술단 지도위원으로 해외에서 많은 공연을 하게 된다.
 
강선영은 스승 한성준의 태평무를 이어받아 인간문화재가 되었지만, 전통춤을 이어가면서도 본인만의 창작 무용에도 힘을 쏟았다. 강선영의 무용작품인 『초혼』은 국내 무용극 최초로 영화화되어 ‘제12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문화영화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소설 『원효대사』(이광수)를 연구해 무용공연을 제작하며, 우리나라 전통춤뿐만 아니라 중국 전통무예도 차용하여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외에도 오페라의 안무를 맡는 등 다양한 예술과의 현업을 하면서 자신만의 무용 세계를 펼쳐나갔다
 
-지역N문화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