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손길이 닿은 전국 150여 채의 고건축들
고택영 선생은 1914년 7월 13일 전북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에서 태어났다. 11세까지 한문을 수학하고 29세 되던 해인 1941년 전북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에서 당숙 고은천 선생이 목수였던 관계로 목공일에 뛰어 들게 되었다. 당시 목수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이유로 당숙이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수가 될 것을 결심한 고택영 선생은 도목수 심태점 선생에게서 한옥목수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1942년에는 정읍군 운학동에 위치한 나용균 선생(전 국회부의장)의 문중에서 실을 짓는데 참여혀아 목수의 자질을 인정받았고 본격적으로 목수수업을 하기 위해 상경하게 된다.
서울에 올라와서 당시 답십리 인근에서 한옥짓는 일에 종사하다가 종로에 있는 조계사에서 대목공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조계사로 찾아갔다.
이때 조계사에서는 6.25전쟁 때 파괴된 대웅전(우측:동(동)측추녀가 파손됨)을 보수하고 있엇다. 여기서 조원재 선생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조원재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한식목공기법을 정식으로 배우게 된다. 조계사 대웅전 보수시에 고택영 선생에게 꽃살문을 짜게 했는데 그때 만든 문이 지금도 남아 있다. 조원재 선생은 꽃살문을 만든 것을 보고 그 섬세함과 정교함에 목수로서 대성할 것을 기대하고 남대문 수리현장에도 종사하게 하였다. 10여년 동안 전북지방에서 작은 민가를 지으면서 자귀질, 대패질, 끌질 등 치목의 포에서 일을 하였으나 서울에 올라와서는 궁궐이나 사원의 법당건축에서 포집 등 거대하고 복잡한 건물을 대하게 되자 민가에서 하는 것과 같이 간단하게 되지 않았다. 고택영 선생은 고건축에 대한 전통기법을 알고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계도본작성법, 먹줄치는 법, 선자연(扇子椽)거는 법 등에 대해서 조원재 선생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1960년에 배희한 대목장(大木匠)을 사사하게 된다. 이때, 충북 증원군 연풍면 정기용 박사 고택을 보수하면서 한옥건물의 해체 및 조립에 대해 배우게 된다. 또한 고건축기능을 보유하면서 풍수지를 연구하게 된다. 도편수로서 건물을 지을때는 좌향(坐向)과 장풍(藏風) 등 기본적인 배치원리를 알아야 하는데 고택영 선생은 어렸을 때 배운 한문을 토대로 하여 근래의 목수로서는 보기 드물게 풍수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김복술 선생에게 좌향론을 배워 집터 잡는 법을 깨우치고 본인이 이를 정리하여 양지배합생기법(陽地配合生氣法)이라는 이론을 세우고 옛 선현들께서 지어 놓은 집과 명당을 찾아다니면서 본인이 세운 이론과 맞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학술적인 장인이라 할 수 있다. 고택영 선생의 손길이 닿은 고건축은 100여건 150여 채에 이른다. 사찰로는 영암 도갑사 해탈문, 합천 해인사 장경판고, 강화 전등사 원통전, 구례 화엄사 대웅전,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 전주 정혜사 보광전, 승주 송광사 국사전, 장흥 보림사 대적광전 등이 있고, 일반 고건축으로는 서울 남대문과 경복궁, 파주 자운서원 등이 있다. 선생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은 김인서, 전명복, 장춘종, 김영성(전수교육조교), 이의찬 등 20명의 문하생들은 ‘해강회(海崗會)’를 조직하고 대목기술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 한국문화재재단에서 발췌